서론: 복지국가를 향한 긴 여정, 대한민국의 선택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산업화를 이루어낸 나라다. 1960년대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을 경험했지만, 그 과정은 불평등과 취약계층의 배제를 동반한 것이기도 했다. 경제발전은 정치·사회적 변화와 맞물려 복지에 대한 국민의 요구를 증폭시켰고, 특히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국가는 국민의 삶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다. 복지국가는 단순한 제도의 집합이 아닌, 국민이 기본적인 삶을 국가로부터 보장받는 구조이며, 이제 대한민국도 그 이상을 향한 여정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떤 수준에 와 있을까?
제도적 기반: 복지국가의 골격은 갖춰졌는가?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주요 복지국가에서 통용되는 핵심 사회보장제도를 대부분 갖추고 있다. 국민연금(1988), 건강보험(1977 시작, 2000년 통합), 고용보험(1995), 산재보험(1964)은 사회보험의 4대 축을 형성하고 있으며, 기초생활보장제도(2000), 기초연금(2014), 아동수당(2018), 장애인연금(2010) 등 공공부조 및 사회수당도 정비되었다.
특히 문재인 정부 시절 보편복지를 확대하려는 정책적 시도가 많았으며,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취약계층에 대한 선별적 복지 강화와 사회서비스의 민간 협력 강화를 추진 중이다. 또한 지자체별로는 아동급식, 공공산후조리원, 무상교복 등 지역 특색에 맞는 복지정책이 시행되고 있어 복지의 공간적 다양성도 확대되고 있다.
2022년 기준 대한민국의 공공사회복지지출은 GDP 대비 약 13.1%로, 2000년대 초반의 5% 수준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약 20~21%)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18%), 일본(23%)에 조금씩 근접하고 있으며, 과거 동아시아의 ‘개발국가’ 모델에서 서유럽형 ‘복지국가’로 전환 중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복지의 질과 사각지대: 확대 이면의 문제들
제도가 있다는 것이 곧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복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국민들이 복지정책의 ‘양적 확대’는 체감하지만, ‘질적 개선’은 미흡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용보험의 경우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예술인 등 신노동계층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으며, 국민연금의 경우 가입자의 불안정한 소득구조로 인해 노후소득보장 기능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경우에도 부양의무자 기준이라는 장벽이 일부 해소되었지만 여전히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으며, ‘생계급여 탈락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장애인 정책의 경우, 이동권과 자립생활 지원은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있으나, 활동지원서비스의 시간 제한, 시설 중심의 복지체계 등은 여전히 개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돌봄 복지의 공공성 확보가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상황에서 공공노인돌봄체계, 보육서비스, 장애인활동지원 등 복지의 공적 책임이 더욱 확대되어야 하나, 여전히 민간 위탁과 가족 책임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서비스원 설립, 돌봄노동자의 공공 고용 확대 등의 정책이 시도되었지만 전국적인 수준의 제도화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복지정책의 전달체계: 주민을 위한 구조인가, 행정을 위한 구조인가
대한민국의 복지정책은 중앙정부 중심의 계획과 예산 편성, 지자체의 실행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 주민이 체감하는 전달체계는 여전히 경직적이고 단절적이다. 읍면동 주민센터는 복지상담, 긴급지원, 기초생활보장 신청, 서비스 연계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지만, 복지전담 공무원의 업무 과중과 인력 부족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사회보장정보원과 복지로 시스템 등 ICT 기반의 통합행정망이 도입되었고, 사례관리 중심의 통합서비스 제공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전히 정보 분산, 기관 간 칸막이 행정, 현장과의 괴리 등이 존재한다. 복지 대상자는 동일한 내용을 여러 기관에 반복해 설명해야 하며, 행정 중심의 전달체계는 주민의 요구를 능동적으로 반영하기 어렵다.
또한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마을복지계획 수립 등 주민 참여형 복지 전달체계가 점차 확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고 주민과의 소통이 형식화된 경우도 많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역복지는 ‘복지를 함께 만들어가는’ 협력 체계를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해서는 주민 역량 강화, 민관협력 강화, 공공 인프라의 지속적 투자 등이 필요하다.
국민 인식과 정치의 역할: 복지국가는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복지국가는 단지 국가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의 권리를 인식하고 정치적 의지를 통해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과거에는 ‘복지는 게으름을 조장한다’, ‘국가에 기대면 안 된다’는 시혜적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청년층과 고령층을 중심으로 복지를 정당한 권리로 인식하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으며, 노동시장 유연화와 불안정 고용이 심화되면서 국민 다수가 복지의 필요성을 직접 체감하고 있다.
정치권의 역할도 중요하다. 복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성이 달라지는 성격이 강하며, 중장기적 계획보다는 단기성과 중심의 사업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무상급식, 무상보육, 긴급재난지원금 등의 이슈는 정책의 필요성 논의보다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복지를 정치적 수단이 아닌 국민 권리 실현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정치문화가 절실하다.
결론: 복지국가, 가능성과 한계를 넘나드는 대한민국
현재 대한민국은 복지국가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제도의 외형은 갖추어졌고, 국민 인식도 과거와 비교해 큰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질적 내실, 지속가능성, 전달체계의 효율성, 복지재정의 안정성 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으며,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사회적 약자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에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복지국가는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결단, 행정적 혁신, 시민의 참여와 인식 변화가 함께 맞물려야 가능한 결과다. 대한민국은 분명히 복지국가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여정은 도전과 기회의 연속이다. 중요한 것은 이 방향을 유지하며, 복지의 질과 형평성을 높여 나가는 것이다. 국민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대한민국은 ‘복지국가’라는 이름에 더욱 걸맞는 나라로 성숙해가야 한다.